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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18) 조언이 타인에게 의미가 없는 이유

조언은 나에게는 맞지만 타인에게는 맞지 않다.

경험이 무의식에 저장되는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험은 의식이 없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 자신을 둘러싼 가까운 사람들의 경험까지 우리 생애에서 모든 감각을 통해 전달된 의식적, 무의식적 경험을 말한다. 부모님에게 받은 유전인자는 자동적으로 태어날 때 무의식 안에 저장된다. 그리고 어렸을 때 자주 보고 듣고 느낀 환경, 이를테면 집안 분위기 , 나고 자란 지역의 특성, 태어난 나라에 만연한 문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 강하게 심어진다. 내 삶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도 나의 무의식을 강하게 채우는 요소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본 모습도 나의 무의식에 깊게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한  의식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 채워진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성인이 된 나에게 아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된 나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것도 이때 형성된 무의식이다. 우리는 삶이 크게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으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성인이 돼서도  좋든 싫든 나의 무의식에 내 생각과 행동을 저당잡힌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다양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타인의 무의식에 영향을 준 요소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도 어렵다. 우리 뇌 안에는 거울신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이 덕분에 우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타인의 경험을 조금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그분은 러시아에서 15년 정도 학생을 가르치시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한국에 나오신 경우다. 말 그대로 한국 문화가 더 생소한 분이시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들의 특징이 있다. 마인드가 한국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분도 그랬다. 서로 느낌이 통했는지 나도 그분을 좋게 보았고 그분도 나에게 여러가지를 물어 보셨다. 요즘 말로 내가 그분께 too much한 부분이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물어본 것만 얘기해도 괜찮았을 텐데 그분을 위한다는 마음에 학교 생활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드린 적이 있다. 한국 사람 같았으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 귀로 듣고 흘렸을 얘기를 필터 거치지 않고 바로 나에게 얘기하셨다.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은 가장 친한 선생님이시고 아침에 만나면 우리 둘만의 인사로 서로를 안아 준다. 이 느낌이 너무 좋다. 나도 책을 읽지 않았다면 관계를 끊었을 만큼 센 표현이 왔지만 정말 하나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분의 무의식에 영향을 준 것들이 어떤 것일지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운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내 위주로 조언을 했구나. 다를 수도 있는데. 그리고 기다렸다. 그분이 직접 부딪쳐서 느끼실 때까지, 그 시간 또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생님이 진짜 저를 위해서 해준 조언이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고 죄송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한마디 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관계를 끊었을 텐데 선생님이라서 괜찮았다고.

 

우리는 타인이 원하지도 않고 근거도 모르면서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려고 한다. 이또한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기는 하다.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됐던 정보가 타인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는 사실이 있다. 옛날 원시시대 때는 나의 정체성이나 다른 사람의 정체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에게 영향을 준 요소나 다른 사람이 영향을 받은 요소가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보도 각자 상황에 맞는 정보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맞는 그러한 정보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때와는 아주 다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상의 인구 숫자만큼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맥상통하는 정보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그렇다고 조언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타인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만 진심을 담아 전해주면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