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내 삶에서 찾아야 하는 단 하나는 '나 자신'이다.
"살기도 바쁜데 뭐 하러 이런 걸 하세요?"
'어른답게 말하기' 강의를 시작할쯤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이 나에게 보낸 메시지 글이다.
정말 그분 말씀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뜬금 없이 나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나를 찾기 전에 우리의 현재의 삶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태어났지만 누군가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거짓 믿음과 패러다임을 물려받았다. 그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짓된 많은 믿음을 우리 것인냥 품으며 그 믿음이 우리를 꽁꽁 옭아매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 뇌의 작동 방식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가 알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배운 각자만의 뇌 공식을 가지고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다. 이를 신념이나 관념, 믿음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도 따지고 보면 개인적이고 독자적이지 않다. 내 것처럼 보여서 아무 의심 없이 사용했을 뿐이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내 삶이 힘들지 않는 한, 내 안에 깊이 박혀 있는 신념이나 믿음이 내 것이 아닐 거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못한다. 삶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의식에 내 삶을 맡겼기 때문이다.
'어른답게 말하기'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한 이유는 '나를 찾는다'로 강의를 어느 카페에 올렸었다. 나도 만약에 이런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나를 어떻게 찾아, 이거 좀 사기 아니야. 하고 등을 돌렸을 것이다.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래도 참가하신 두 분이 계셨다. 이분들이 좀 특별한 분들이시다. 좀 더 사람들에게 친근한 제목으로 바꾼 것이 '어른답게 말하기'다. 그런데 이것도 좀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어른답게 말하기'가 결국에는 나를 찾는 여정에 마지막 관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상황에 맞게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바도 이것이라고 믿고 한 일들이다. 그럼에도 쉽지 않았다. 내 믿음에는 변함이 없는데 이걸로는 부족했다. 나의 약한 추진력과 사람들의 소극적인 반응을 바꾸기에는 내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 벌어진 모든 상황을 그냥 잘 받아들인다. 그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맞다. 생각만으로 내 삶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도 꾸준히 절실하게 하면 우주와 자연과 나의 무의식이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고 하니 이 말을 긍적적으로 믿는다.
나는 나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며칠 전 강의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의 자아는 셋이고 나의 자아도 셋이지만 나의 자아는 아주 많은 부분이 겹쳐 있어서 셋이 거의 비슷하다.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책을 읽어서 향상된 부분도 많지만 유전적으로 좀 가지고 태어난 부분도 있고 다행스럽게 내 삶의 기준을 지킨 덕분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 저학년 남학생이 여학생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내 일은 아니였지만 혼내준 기억이 있다. 20대 때 회사에서의 일이다. 외부 사람이었는데 돈이 없다고 돈을 꿔달라고 했다. 큰 돈은 아니였지만 이렇게 말한 기억이 있다. 길을 가다가 모르는 분이 내게 부산에 갈 차비가 없으니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는데 사기였다. 사람을 믿고 싶은데 그 사람 때문에 내 믿음에 금이 갔다. 내가 큰 돈이 아니라 빌려 주지만 꼭 갚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그 믿음이 틀렸다고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 분이 정말 음료수를 사가지고 오셔서 꾼 돈을 갚고 가셨다. 몇 년 전의 일이다. 내가 13년 정도 강의를 한 곳이다. 그러니 거기에 계신 분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은 몰라도 대충은 알 것이다. 관리자가 새로 오셔서 여러가지를 바꾸면서 강사들도 새로운 조건으로 계약을 해야 했다. 면접을 봤다. 거기에는 새로오신 관리자 한 분과 오랫동안 일을 같이한 사무실 선생님 한분도 함께 했다. 나보다 나이가 좀 어린 분이시다. 그렇게 셋이서 앉아서 면접을 봤다. 질문은 단 하나였다? 우리 학교를 위해 무엇을 하겠냐는 것이다. 나의 대답은 지금까지 해온것처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관리자분이 이러면 안 된다고 하신다. 다른 대답을 하셔야 한다고, 다른 분들도 다 그러셨다고, 순간 머리가 띵했다. 난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인데, 여기서 뭘 더, 그리고 잠시 침묵의 시간이 가고 나는 했던 말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내 자존감에 금이 가고 있었고 나보다 어린 직원분을 보기도 민망했다. 그렇게 그곳과의 인연은 거기까지 였다. 내 삶의 방향과 맞지 않으면 나는 가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행동을 한다. 이러한 행동이 삶을 살아가는데 좋지도 않고 나에게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이런 행동들을 하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있고 싶지 않고 그러한 행동으로 생기는 결과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나를 믿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행동이다. 지금도 같다. 강사라는 신분이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다. 타협을 보면 잘 갈 수 있지만 그러려면 내 삶의 기준이나 가치관들을 바꿔야 한다. 만약에 이래야 한다면 나는 좀 불편하더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택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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